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현대 한국인의 사회의식에 관한 진단과 개선2

2005.12.02 17:22

장봉현 조회 수:8641

이상 선인들의 민족의 사회의식을 개혁하자는 노력을 검토해 보았으나 한결같이 자기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완전한 의식개혁이란 부처나 성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여기에 가까이 접근하려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본 연구에서는 우리의 현재의 의식의 진단과 과거와 현재의 우리들의 의식 개혁이 된 점이 어떤 것이고 되지 못한 것이 어떤 것이며 더욱 악화된 것은 어떤 것인가를 앞서 말한 과학적, 정신분석적, 도적인 원리에서 검토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종전에 뚜렷이 부각되지 못한 점을 부각시켜 보자는 것이다.


IV. 현대한국인의 사회의식의 진단


5.16의 주체는 5대 사회악을 소탕하고 민생을 도탄에서 구한다고 외쳤으나 언론자유를 봉쇄함으로서 스스로의 악을 비판받을 기회를 얻지 못하여 스스로 보다 더 큰 큐모의 악의 표본을 남겨 놓았다. 제5공화국에서도 3대 부정적 심리를 추방하자고 의식개혁운동을 전개했다. 부패 심리, 무질서 심리, 인플레 심리 세 가지를 들고 이것을 또 세분하고 있다. 부패 심리에는 청탁, 공사무분별, 물질주의, 금품수수, 뇌물을 들고 있고 무질서 심리에는 상도의, 준법정신, 공중도덕, 행락질서를 들고 있고 인플레 심리로서는 물가불안정, 매점매석, 임금인상, 허례허식, 한탕주의를 들고 있다. 정부에서 실시하고 있는 정의사회구현을 위한 의식개혁 세부실천계획을 보면 기본지침에서 의식개혁은 "나" 자신과 가정으로부터 출발,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켜 본격적으로 추진을 하는데 모든 공직자는 역사적 소명주의 아래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의식개혁의 일대전기가 될 수 있도록 의무적으로 최완선봉 역할 수행, 각계 지도층 인사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절감, 비장한 각오로 의식개혁에 솔선수범, 모든 국민은 의식의 전환 없이는 국가의 지속적 발전과 번영이 어렵다는 점을 깊이 자각, 의식개혁에 자발적으로 적극 참여, 학생들에게 대하여는 계도와 교육을 통하여 의식개혁의 필연성을 깊이 인식시켜 올바른 의식을 가꾸어 나가도록 전력경주.

의식개혁은 자기주변의 가장 가깝고 쉬운 과제부터 실천, 위로부터 아래로 확산시켜 일상 생활 속에 체질화되도록 장기적 안목에서 체계적으로 강력히 추진하되 모든 연수기관을 총동원하여 의식개혁에 관한 교육을 우선적으로 실시, 공사의 모든 사회단체가 구심점이 되어 의식개혁 추진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 각급 학교는 의식개혁에 관한 기초적이고 근원적인 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 모든 국민은 일상생활에서는 물론, 각종 모임이나 행사 시에는 반드시 의식개혁을 실천 생활화, 각종 세미나 토론회 등을 통하여 의식개혁의 필연성과 이론 및 방향을 계속 발전 체계화, 의식개혁에 관한 사항을 바르게 실천하는 국민이 혜택을 볼 수 있는 사회적 환경과 여건 조성을 하기로 되어 있다.

9대 실천 요강으로서 분수의식, 자기본분, 가정교육, 주인의식, 책임의식, 국민화합을 달성하게 노력하면서 정직, 질서, 창조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개혁운동은 종전에 비해서 진일보한 것이고 좀 더 구체적이고 그대로 실천이 된다면 이상적인 사회가 건설될 것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의식개혁을 이끌고 나가는 사람들 자신이 얼마나 의식개혁이 되어 있고 의식개혁의 필요성이 얼마나 절실하고 그 역사적인 의미를 투철하게 몸에 지니고 있는가 얼마나 이러한 요강을 스스로 실천을 하고 있는가가 문제다. 의식개혁은 주도하는 사람들의 의식개혁은 누가 어떻게 하는가가 문제의 관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지도층의 의식 진단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여기에서 역사를 정신의학적, 정신분석적으로 조명을 가해 볼 필요를 느낀다. 이러한 방법은 가칭 역사정신의학(필자의 조어)적 방법이라고 불러 보기로 한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일제가 심은 반도사관을 떠나서 본다면 어떤 이는 한민족은 인류의 최고문명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문명을 창조한 일지족(一支族)이 동으로 흘러 토착민족과 혼혈이 되었다는 견해, 백두산을 중심으로 발상지로 삼은 견해 등이 있으나 현재 밝혀진 사실은 중국의 역대 왕이나 황제가 동이 출신이라는 점이다. 맹자 이루장(離婁章)에 공자가 가장 숭앙하는 유교정신의 화신으로 삼고 있는 순왕은 동이지인야(東夷之人也)라고 하고 주나라를 세운 문왕은 서이지인야(西夷之人也)라고 나와 있다 (주). 문왕은 후진족으로서 선진인 동이문명국인 은(殷)을 멸하고 동이문명을 계승한 것이고 그후에 서역의 문화를 흡수한 것이 그후의 중국문화인 것이다.

진시황이 중국의 통일하기 전에는 동이가 지금의 중국본토에 동이로서 살고 있었으며 시황의 통일 이후에는 일부는 동으로 이동하고 본토에 남은 동이는 중국인으로 자처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도 고구려나 백제, 신라나 중국본토에 까지 진출한 기록을 볼 수 있다.

고구려가 형제 싸움으로 망하고 신라가 당을 끌어 들여서 삼국을 통일한 후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가 갑자기 좁아졌다. 좁아질 뿐 만 아니라 왜구의 빈번한 침입과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고도 과거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없어 한말에 이르러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광복 후에는 38선으로 남북으로 분단이 되고 북은 소련 점령 하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어 현재까지 김일성 개인 독재가 계속되어 오고 남에서는 미군이 점령하여 일인의 자문을 구하고 친일파를 등용했고 대한민국이 수립되어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단하기 위한 반민특위(反民特委)가 도리어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습격을 받아 이승만은 정권유지를 위해서 반민특위를 해산시키고서 민족정기를 세워보자는 싹이 여기서 잘라져버린 것이다.

이후에는 적산쟁탈(敵産爭奪)로부터 출발 모든 사회악이 창궐하기 시작하였다. 반민특위가 해산되기 전 특히 해방 직후에는 광복이라는 기쁨에서 모든 국민이 참회하고 동족의식과 일체감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헌법도 평등한 사회주의 경제를 지향하는 것 같이 되어 있었다. 반민특위가 해산됨으로 해서 그 이전에는 일인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주는 적산(敵産)도 받기를 거절, 부끄럽게 생각하던 사람들도 다투어 가지려고 하게 되고,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이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중용함으로 해서 국민의 의식과 사회 문화는 근본적인 변동이 없이 흘러 오다가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숙청하지 못함으로 해서 대한민국은 친일파의 세상이요, 일제의 연장이요, 거기다가 친미파가 첨가가 되었다. 따라서 비판적 주체적인 언론은 압살되어 빨갱이나 국수주의로 몰리는 풍토가 조성되었다. 임진왜란, 한말, 일제식민지하에 해결 못한 문제를 자각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었고, 조급한 한일국교정상화는 일본으로부터의 사과와 배상을 받고 진정한 호혜평등한 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일본은 한국을 외국으로 보지 않고 과거의 연장, 즉 일본의 일부로 보는 심리가 계속 지배하게 되었다. 수 천년간 일본이나 미국에 대한 비판은 친공(親共)이 아니면 반국가적인 것으로 보는 사회풍토가 얼마 전까지도 유지되어 왔었다.


----------------------------------
(주) 맹자 이루장에 순 임금은 동이사람이고 주 문왕은 서이사람이고 출생지를 명기하고 있다. 동이문화가 앞서 있었고 서이는 후진이고 주나라는 동이문화를 계승한 것임.


이상은 한국인의 사회의식의 역사적 배경을 고찰해 보았으나 그러면 현재의 한국인의 사회의식은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

한마디로 주체성을 찾지 못하고 주체성을 찾으려는 진통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위 운동권학생들은 민족 민주 민중 주체를 부르짖으면서 결론에 가서는 프롤레타리아독재니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종속이 되고 만다. 소위 제3세대의 학자의 주장도 민족 민주 주체 민중을 부르짖기도 하나 결론에 가서는 민중독재서 프롤레타리아독재라는 외래사상에 종속이 되고 만다. 이것은 비단 운동권학생이나 제3세대의 학자뿐만 아니라, 거의 국민전체 사회전체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단지 종속이 되는 외래사상의 내용이 다를 뿐이다.

정치의식에서는 공산주의냐, 민주주의냐, 독재주의냐, 자유주의냐, 한때는 한국적 민주주의가 박정권의 유신체제에서 제창되기도 했다. 정치학자들이 민주주의를 논하는 것을 들어보면 서양의 민주주의가 마치 동양의 왕도정치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한다. 우리나라의 정치학교수들은 민주주의(서양의)가 이상적인 정치형태고 지도자는 국리민복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 1972년 10월 유신 직전에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있었던 `한국인의 재발견'이란 월1회 10개월간의 세미나중 정치 분야의 토론이나 발표에서 주체적인 논의는 없고 당시에 정부에서 한국적 민주주의를 제창하기 시작할 때였는데 한국에는 민주전통이 없다면서 서양의 민주주의를 논하는 것을 들어보니 그것은 서양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동양의 왕도정치를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때 나는 정치학의 문외한으로서 정부에서 한국적 민주주의를 하자고 하면 왜 정치학자들은 멀리 삼국시대나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조선조만 해도 임금을 제지하는 공식기관이나 길이 여섯이나 되는데 지금 대통령을 제지하는 기관이나 공식적인 제도가 어디 있는가? 조선조 정도의 제도만해도 훌륭한 한국적 민주주의가 아닌가? 정치학자들은 왜 그런 주장을 못하는가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곧 10월유신이 선포되었다. 이 세미나가 있은 후 집에서 우연히 `신동아'를 보았더니 한국교수와 미국정치학교수의 민주주의 좌담회 기사가 있었다. 역시 한국교수들이 민주주의를 말하니 미국교수가 한국교수에게 서양의 민주주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서양의 민주주의는 정치가는 도둑놈으로 보고 도둑놈끼리 서로 감시해서 될 수 있는 대로 도둑질을 줄이자는 것이 삼권분립의 서양의 민주주의라는 것을 누누이 설명하고 있었다.

이것이 외국어나 외국의 관념이나 사상이나 제도를 번역이나 도입하는 과정에서 의미가 변질된다는 것이 충분히 검토나 자각을 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외래적인 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항상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바꾸려는 무의식적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원고를 써서 편집자에 넘겨도 편집자가 모르는 말은 자기가 아는 말로 고쳐 쓰여진다. 실지 내가 경험한 것으로는 도적(道的)이라고 원고를 썼는데 인쇄되어 나온 논문을 보니 도덕적(道德的)이라고 고쳐져 있었고 민족정기(民族正氣)라고 썼는데 민족정기(民族精氣)라고 고쳐서 인쇄되어 나왔었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에서 30여년 전에 행한 심리학적 실험에서 증명된 바 있다. 즉 사람은 새로운 것을 과거 경험으로 아는 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서양에 가서 정치학을 공부하거나 국내에서 서양의 정치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무의식 속에 들어 있는 왕도정치로 서양의 민주주의를 만들어 버린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전통적인 정치나 정치제도의 검토나 이해 없이 서양인의 입장에서 쓴 역사나 정치 정치제도나 이론을 공부해서 서양적인 입장에서 우리 정치를 생각하는 듯하면서 사실은 무의식적으로는 한국적인 발상에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서양적인 것도 아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정치의식은 왕은 성군이라야 하고 제왕학(帝王學)을 공부를 해야 되고 하늘을 대신해서 백성을 보살필 의무가 있고 이것을 잘 수행하지 못하면 물러나든지 갈아치워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의 왕은 철저한 제왕학도 없고 전제군주나 귀족이나 승려의 횡포에 대해 서민의 심판 쟁취의 싸움에서 얻어진 것이 서양의 민주정치다. 이론상으로 플라톤의 철인정치(哲人政治)가 있지만은 현실적으로는 왕도정치(王道政治)란 없고 패도정치(覇道政治)가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정치 지도자를 왕도정치를 베푸는 성군이 되어야 한다 또는 성군처럼 무의식적으로 기대를 하지 서양사람처럼 도둑놈으로 생각하고 도둑질을 막자는 면이 지극히 약하고 믿고 아끼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정치의식의 발상의 차이를 분명하게 의식자각을 하지 못함으로 해서 현실정치의 혼란이 오고 있다.

다음으로 경제의식을 검토해 보면 경제와 정치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정경유착이라는 말을 낳게 까지 한다. 우리나라의 전통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이다. 실학의 전통이 있고 왕이나 목민관은 백성의 생활 경제를 보살필 의무를 지니고 있으나 서양에서처럼 착취하는 경향도 항상 없지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자녀교육에서 될 수 있는대로 돈을 보여주지 않고 물욕을 자극시키지 않는데 주력하고, 상업이나 공업을 천시하고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하고 농업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전통에서 경제와 그에 따른 무력과 침략을 앞세우는, 왕도정치의 전통이 없는 서양의 문명을 먼저 받아들인 일본의 침략을 받아, 주체적인 서양문명의 흡수수용의 태세를 갖출 틈도 없이 주체성이 말살되어 일본식민지로 전락하여 서양문명을 직접 수입할 길마저 봉쇄 당하고 일본인의 소화능력이 부족한 탓으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서양문명의 재탕을 교육받게 되고 우리 문화에 대한 철저한 멸시를 주입 당하고 부정적인 한국관이 우리에게 심어졌다.

일본은 그런대로 명치유신이전에 각번 단위로 경제가 발전되어 서양문명을 일본식으로 흡수할 토태(土台)가 마련되어 있었다. 일제하에서는 한국인은 모든 방면에 다 활동의 제한을 받았지만 경제활동도 극심한 제약을 받았다. 소유권 등록을 못해서 토지를 빼앗기고 지주가 고작이고 경성 방직정도의 경제활동이 있을 뿐 대부분의 경제권은 일인 소유에 들어가 있었다. 광복과 더불어 우리는 주체적인 정부가 아닌 일제의 연장으로 일제 때의 제도와 의식구조의 주체적인 개혁없이 내려왔기 때문에 개화기나 일제시대에 대한 철저한 검토와 반성이 없어 무의식중에 일제시대의 행동을 되풀이 할 뿐만 아니라 광복 후의 한국경제가 일본인이 남기고 간 공장이나 토지, 가족, 일본인 소유의 재산을 인계 또는 불하를 받는데서부터 주체성이 제대로 싹틀 수가 없었다. 일본인 밑에서 일하던 한국인이 상전으로부터 물려받는 사람이 많고 이러한 관계를 한일국교정상화 이후에는 또다시 복귀된 경향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관계나 의식구조가 주종관계로 복귀했기 때문에 생산자본, 시설, 기술, 운영방식이 다분히 일본식이 침투되어 있다.

대일 수입적자폭을 줄이기 위해서 원자재나 부품 기계의 국산화를 서두르고 있으나 이런 것은 처음부터 착수해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 서두르게 되는 원인이 주체성 결여, 의식구조가 일제시대를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에 수출되는 자동차의 예로 들어도 일제부품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일본장사를 해주는 결과를 빚고 있는 것이다.

경제의 일본에 예속화가 식민잔재를 청산하지 못해서 빚어지는 문제이지만 다른 한가지는 경제사상의 문제다. 우리는 경제를 논할 때에 흔히 자본주의다 공산주의다 사회주의다 혼합경제다 이런 말을 쓰고 그 이외의 다른 것을 상상도 못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은 우리의 자생적인 전통적인 경제사상은 없는가? 하는 의문제기가 없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좋은 점은 무엇인가? 공산주의의 좋은 점은 무엇이고 나쁜 점은 무엇인가? 혼합경제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제3의 경제는 없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손쉽게 서양의 자유주의 경제이론이나 유물사관을 우리 경제에 뜯어 맞히는 경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에 첨예화되어 있는 노사분규를 보면 사회혼란을 야기시키고자 하는 외부세력의 지령이나 선동이 있는 것이 짐작이 되지마는 사용자나 근로자의 의식구조가 주체적인 민주화가 되어 있지 못해서 일어난다는 것이 근본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미국이나 유럽에서 적자로 망한 공장을 한국회사에서 인수를 해서 흑자를 내고 노사분규도 없고 노조에도 가입을 않는다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신문에 보도는 되지마는 이러한 경영방식을 국내에서 시행하라는 운동이나 논의가 없는 것은 매우 기이한 현상으로 보인다. 이들 한국의 경영자들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한 것을 보면 경영진들이 근로자를 만나서 어려운 점을 물어보고 운영에 반영하고 근로자의 생일, 심지어 가족의 생일, 아플 때는 문병 관혼상에 참여하고 한 가족과 같이 대해주기 때문에 일을 열심히 하고 만족해한다는 것이다. 정신치료를 하는 정신과의사로서 내가 이 소식을 접했을 때 느낌은 아! 이 한국의 경영자들이 자기도 모르게 자기 속에 흐르고 있는 우리의 인(仁),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을 발휘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다. 왜 국내에서 이런 정신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를 심각하게 검토 논의는 않고 서양이나 일본처럼 한번 거쳐야 될 홍역이다 하고 일본의 춘투를 모방하는 것처럼 보도하는 신문의 태도도 비주체적인 것이다.

외국에 나가서 성공한 한국의 경영이 한국적 경영의 모델인 동시에 외국에 본보기가 될 만한 경영이다. 서양식으로 만성적으로 대립 투쟁하는 것은 필요도 없고 공영공존의 홍익인간정신을 노사 양쪽에 일깨워주는 것이 노사분규의 궁극적 해결이다. 그렇지 못하면 영국처럼 또 현재의 우리나라처럼 경제의 위축이 있을 뿐이다.

종교에 대한 의식도 정치 경제나 별다를 것이 없다. 한국의 종교는 일제의 침략과 일제를 통한 서양문명의 유입 광복 후는 일제잔재에다가 서양 주로 미국의 압도적 영향을 받고 있다. 전통적인 종교인 불교나 유교나 무당을 보면 불교는 일제하에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흡수시키려는 시도에서 대처를 허용함으로서 지금까지 광복 후 44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불교분쟁이 끝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일제잔재의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교는 조선조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천시해서 유교는 한국의 지배층을 대표하고 유림이 서민과 더불어 한국의 주체성을 대표해서 일본침략 후에 의병활동을 계속했기 때문에 일제의 파괴공작의 첫 목표였다. 그러기 때문에 일제시대에 교육을 받은 한국의 지도층은 한국 역사, 전통, 문화, 한국인에 대해서 부정적인 상을 가지고 있고 유교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그러기 때문에 유교는 이러한 천시의 풍토로 인해서 충분히 연구되고 그 가치가 알려져 있지 못하고 서양에서 가치를 알아주기 시작해서 근래에는 과거보다는 연구의 관심이 대두하고 있으나 아직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리라 본다.

기독교는 전래의 역사는 짧으나 최근 급격히 팽창하고 여러가지 좋지 않은 부작용까지 빚고 있다. 기독교 전파의 역사가 서양의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으로서 토착민에 침투, 정보수집과 문화침략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나 일제하에서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해서 한국인의 서양문화 섭취와 독립운동을 도와주고 독립운동자중에 기독교 지도자들이 많았다는 긍정적 의미가 많았다. 그러나 광복 후에는 점령군을 업고 정부수립 이후 현재까지 일부 기독교인들이 단군을 국조로서 받드는 것을 반대한다거나 세금없는 막대한 헌금을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이웃사랑이나 국가나 국민전체를 위한 사업보다는 거대한 건축물을 짖기를 경쟁하거나 교세확장에만 급급하고 사치나 소비풍조를 자극하고 국민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교회도 적지 않다. 최근에는 좀 나아지는 움직임도 없지 않으나 기독교인들이 교육계, 학계, 신문방송 방면에 대량 진출해서 기독교의 교세확장을 은연중에 도모한다거나 교과서에 기독교이외의 전통적 종교나 문화를 원시적인 것으로 해서 고소를 당하는 일까지 발생하는 형편이다. 물론 극소수의 기독교 목사나 교인이 동양사상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대세는 반대로 흐르고 있다. 여자대학으로서 석사까지 마치고 다른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학생이 필자로부터 강의시간에 동양사상 얘기를 듣고 생전 처음이라고 그때까지 기독교 얘기 밖에 들은 것이 없다는데 필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것은 기독교만의 죄는 아니다. 기독교의 토착화 주체적 기독교는 기독교의 역사가 오래된 나라에서는 쇠퇴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한국기독교는 오히려 왕성하게 팽창하면서 외국에 선교사를 파견, 장차 한국이 기독교의 중심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정도의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이러한 기독교가 한국에서 팽창하는 것은 기독교 자체의 침략성, 공격성에도 원인이 있겠지만은 한국의 전통이나 한국인의 심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이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한국의 전통(도)을 바탕으로 하는 기독교의 종교개혁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도 유교나 불교도 일제잔재를 청산하고 눈을 뜨고 세계성을 획득하고 전통을 계승을 하는 작업이 절실하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유교는 조선조의 지배사상이고 유림이 지배층이라 일제에 의해서 파괴의 목표가 되었고 일제의 왕실은 유교정신의 일부를 고수해서 충군애국으로 국민을 통치하면서 서양에 대한 열등감으로 동양 것을 천시하는 일인으로부터 식민지시대에 배우고 여기에 더 첨가해서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지 못한 자신을 멸시 말살하는 `공격자와의 동일시'라는 심적 기제로서 우리의 역사, 전통, 국민성을 천시하고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풍토가 청산을 못하고 있으면서, 서양에서 도리어 유교나 불교를 흡수해가는 경향이 증대되어 가고 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우리가 현재 학교에서나 가정이나 우리의 전통보다 서양식 교육을 하고 서양문화, 서양학문을 가르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한 주체적인 비판이나 파악이 되어 있지 않다. 그러면서 서양에서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흡수하려는 경향이 불어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유교인이나 불교인은 서양인이나 서양교육을 받은 또는 받고 있는 우리국민에 대해서 전통에 대한 교육을 단순히 전통적 방법으로만 해서는 제대로 이해나 교육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유교나 불교의 경우에는 서양의 심리학이나 정신의학, 정신분석, 정신치료와 연결을 지워주는 것이다. 필자가 다년간 여기에 관심을 두고 얻은 결론은 유교나 불교의 진수는 서양식 정신분석인 정신치료를 성공적으로 받은 후에 수도를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점이다.

전통적인 유, 불, 노장의 경전의 뜻은 자기 마음을 깨달음으로 참다운 뜻을 알게 되고 유, 불, 노장의 도는 서양의 정신분석적인 정신치료보다 높은 궁극적 경지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양의 정신치료와 동양의 도가 합치는 곳이 영성신학(靈性神學)이니, 무아심리학(無我心理學)이다. 이렇게 되면 궁극적으로는 이런 것들이 하나가 된다고 내다 볼 수 있다.

학술분야에서는 개화기 이후에는 서양문화가 우월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싹트기 시작해서 일제의 한국문화 말살교육에 힘힙어 극소수를 제외하고 학술이라면 서양학술을 뜻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얼마 전까지도 동양철학이나 국악, 한의학을 하는 사람은 천시되고 스스로도 열등감을 느낄 정도였다. 특히 국사는 한말에 학교교육을 시작할 때도 일본인이 쓴 한국사를 가르치고 계속 왜곡된 식민사관을 탈피하지 못한 국사를 현재도 교육하고 있다. 지금 모든 학문분야가 일본인을 통해서 배운 서양학문, 광복 후 직접 서양에서 배운 학문이 거의 다다. 일본인의 저서나 번역, 아니면 일본인 학자의 소개로 알게 된 유럽사람들의 원서의 학설에 머물어 있는 수준, 아니면 광복 후 영미 기타 유럽 또는 일본에 가서 배워온 사람들이다. 외국에 가서 그 나라를 연구하는 것 보다 대부분이 한국에 관한 박사논문이니, 자연 외국인 지도교수이니 수준이 떨어지게 되고 외국인식으로 공부를 하고 주체적인 자세가 없다. 외국인의 구미에 맞게 논문을 쓰게 된다. 외국 유학을 가지 않은 학자도 대부분 그런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각분야가 대부분 서양학문의 완전소화도 없이 서양의 이론을 한국에 대한 철저한 연구없이 적용하는 정도에 그친다.

심지어 국학분야에 조차 그런 경우를 보는 경우가 많다. 외국 유학을 간 사람이나 가지 않은 사람을 막론하고 외국인에게 잘 보여서 이름을 내고 싶어서 그런지 외국인의 마음에 들게 해석을 하거나 논문을 쓰고 국내에 내려오는 뿌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외국에서 박사를 해온 정도의 수준이 지배적인 경우가 많다. 평생을 연구한 권위자의 존재가 드물고 새로운 외국 이론이나 개념, 용어가 우월성의 무기가 되기 조차한다. 한마디로 자생적인 주체적인 연구나 이론이 없이 외국인의 입장에서의 연구, 외국 이론을 한국현상에 적용해서 투사하는 수준이다.

교육에 있어서는 문제가 일반적이고 영향이 크기 때문에 병이 더욱 심각하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조직적인 한국말살교육을 해온 것이 그대로 답습이 되어 내려오고 있다. 과거 또는 현재도 국사교육이 일본식민지사관에 입각한 교육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문화가 동이문화를 토태(土台)로 서역의 문화를 섭취한 것이고 중국의 황제가 대부분 동방족이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는 중국본토에 동이인으로서 우리의 동족이 살고 있었고 그 후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가 진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잘 교육되고 있지 않다. 일본에 대해서는 한국인이 지속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토착민을 정복하고 한국문화를 심어 왔고 일본의 왕실이나 과거의 지배계급이 한국인의 후손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제대로 교육하고 있지 않고 있다. 현재의 국사교육으로서는 한국인상이나 뿌리가 모호하게 되어 있다. 일본왕은 스스로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데 한국의 많은 대학교수는 소설같은 얘기라고 믿지 않는다. 일본의 왕실안에 여자들은 속옷을 입고 시루떡을 먹고 마늘 먹는 의식을 하고 있는 것등 여러가지 증거가 많고 공공연하게 발표를 하지 않을 뿐 사적으로는 많은 일본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중국문화를 창조한 종족이 우리의 동족이고 일본을 정복하고 우리 문화를 그 곳에 심은 것이 고대한국인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교육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일본건국에 한국의 도움이 컸다느니 일본문화 건설에 한국으로부터의 도래인(渡來人)이 큰 역할을 했다느니 우리의 국사가 아니라 현재 중국인의 입장, 일본인의 입장에서 우리의 국사를 교육하고 있는 실정이다. 말하자면 주체성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면 밑바닥에서는 주체성이 소멸된 적이 없었지만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 간단없이 만주나 중국으로부터의 압력으로 특히 조선조에 와서는 모화사상(慕華思想)이 정착이 되어 현재 일본의 눈치를 보느라 한국사를 제대로 쓰거나 교육을 못하는 풍토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한말에 유길준이 국사, 국어, 과학 세 가지 교육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을 했는데 광복 후 현재까지 이러한 취지에서 문교정책을 펴 본적이 없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지금 가장 발행부수가 많은 신문의 사설에도 "일응"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주로 판검사들이 논고나 판결문을 쓸 때 일본말에 물들어 쓰는 것이 퍼져서 그런지 판검사아닌 사람에까지 번진 것 같다. 이 말은 한글사전에도 없는 일본말 "일응(一應)"의 한국발음이다. 우리말로는 아가씨라고 해야할 때 "언니"라고 부르는 경우, "보여진다" "지어졌다" 등등 귀에 거슬리는 일본식 한국말이 많다. 이런 피동형의 표현은 국문학교수, 고고학자, 국사교수 등으로 비롯해서 국민전체에 퍼져있다.

국어는 일제식민지시대에 국어교육을 금지시키는 일까지 있어도 단어가 일본말이 침투해도 문장구조에는 침투하지 못했는데 도리어 광복 후에 우리말의 일본화가 심화된 느낌이다. 이것은 1980년대에 일본서적이 대량 번역이 되어 출판됨으로해서 일본말을 모르는 젊은 세대에까지 일본식 한국말이 무의식적으로 침투한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일본어에도 서툴고 우리말에도 서툰 번역자가 많아서 그런 결과를 초래하고 이러한 분위기에 국문학교수까지 무의식중에 휩쓸려간 느낌이다.

필자가 실지 경험한 경우를 보면 가장 수준이 높기를 자랑하는 주간지에 "일화견주의자(日和見主義者)"라는 말을 발견하고 책임자에게 알려준 일이 있다. 일본글을 그대로 한국말로 옮기는데 이 번역자는 과연 이 일본말의 뜻을 알았는지 의문이다. 안다면 기회주의자라고 번역했을 것이 틀림이 없다. 그리고 몇 해 전에 모경제신문에 연재되는 소설에 "유단대적(油斷大敵)"이라는 말을 보고 경악을 금할수 없어 친구들에게도 말한 적이 있다. 물론 한글사전이나 한한사전(漢韓辭典)에도 없고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에도 없고 일어사전에만 있는 일본에서만 사용되는 한자단어다. 불경에서 따서 일본에서만 쓰고 중국이나 한국에는 없는 단어다. 이 소설의 작가는 일본말이고 한국말이고 대단히 능통한 분이다. 일본말에 너무 익숙해서 일본말인지 모르고 나와 버린건지 아니면 일본인이 쓴 소설을 베낀 것인지 둘 중에 하나임은 틀림없으나 주체적인 국어의식이 희박한 것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임상가를 위한 교합학

안녕하십니까? 치과의사 홍성우입니다.
오늘날 의학은 눈부시게 발전되어 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료, 유전자를 이용한 치료와 같은 첨단 시술이 행해지고 또한 개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과 150년 전만해도 병원은 사람이 살아나가는 곳이 아니라 죽어나가는 곳으로 인식되던 시기였으며 의학은 그야말로 암울했습니다. 그러던 중 레이벤후크에 의해 현미경이 발명되면서 세균의 정체가 드러났고, 파스퇴르와 코흐 같은 과학자의 노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은 죽음의 문턱에서 생명을 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치과질환인 충치 그리고 풍치 역시 교합과 관련지어 발생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며 교합을 이해함으로써 이런 질환들도 보다 효과적으로 치료가 가능해질 수 있는데, 이런 재미난(?) 치과이야기들을 치과의사가 아닌 분들이 쉽게 이해하시고, 아울러 이런 이야기들이 좋은 치료를 위한 눈과 귀가 되어드리기를 희망하면서 두 권의 책을 2012 년, 2014 년에 출간했으며, 2023 년 11 월에 개정판을 출간했습니다.


임상가를 위한 교합학
Vol 1


임상가를 위한 교합학
Vol 2


홍성우의 임상가를
위한 교합학-개정판


잘 닦는데 왜 썩어요?

왜 혼자만 치아가 잘 썩을까요? 치료받은 치아가 또 썩는다면 정말 안닦아서 그럴까요? 재미있는 사실은 치과의사들도 충치가 있답니다.
남들은 찬물을 잘 마시는데 왜 혼자만 치아가 시릴까요? 그리고 신경치료를 해서 아예 시린 통증을 못느끼게 하는 치료가 정말 좋은 치료일까요?
왜 음식물이 혼자만 잘 낄까요? 치과에서는 인공치를 하라거나 두 개를 붙혀서 아예 끼지 않도록 하라는데 그게 맞는 치료일까요?
치과에서 교정을 하라면서 치아들을 뽑으라는데 정말 뽑지 않고서는 교정치료가 불가능할까요?
매스컴의 발달과 더불어 현대인들은 많은 의료광고를 접하게 되는데 이런 정보의 홍수 속에서 좋은 정보를 가려내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여기 알기 쉬운 치과상식 그리고 꼭 알아야 할 치과상식을 소개드리며, 좋은 치료 그리고 꼭 합당한 치료를 받으시길 소망해봅니다.


잘 닦는데 왜 썩어요?

©2013 KSODESIGN.All Rights Reserved